상하이는 중세사의 간소함과 근대사의 복잡성, 그리고 현대사의 놀라운 속도로 진화하는 다층적인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도시입니다. 어촌 마을에서 시작해 조계 시대에 중국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도시로 성장한 상하이의 여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중국 상하이 여행 주요 키워드
1. 작은 어촌 마을에서 기원하다 - 후 沪
기원전 4,000년경~4,200년경
고대 상하이의 시작은 기원전 4,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지역 주민들은 주로 어로 생활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대나무로 만든 통발을 상징으로 하는 글자 '沪(후)'로 상하이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글자는 현재까지도 상하이의 자동차 번호판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 문헌에 따르면, 춘추 시대에는 오나라, 전국 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한 상하이는 초나라의 재상인 황헐이 이 지역에 부임하면서 크게 변모했습니다. 황헐은 강물을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였고, 이 강은 그의 이름을 딴 황푸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황헐은 그의 시대에서 높은 존경을 받은 4대 공자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이는 상하이가 가진 또 다른 이름인 '션(申)'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2. 도시의 새로운 시작 - 상하이의 등장
8세기 중반
북송 시대의 문헌에 따르면, 쑤저우의 호수 타이후에서 흘러나온 우쑹강 하류에 상하이푸와 샤하이푸라는 두 하천이 나란히 흘러갔다고 전해집니다. 이 지역이 지금의 와이탄 남쪽인 스류푸 선착장 부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상하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원래는 원시적인 어촌이었던 상하이는 당나라 시대인 751년에 공식적으로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상하이진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상하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며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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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00년 전, 튼튼한 성벽의 처음 - 고대 성곽
13세기 중반~16세기 중반
상하이가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과정은 남송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항저우와 같은 수도와 강남의 운하 도시들이 중심으로 번성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1267년에는 상하이가 중요한 항구로 성장하여 관청이 설치되었으며, 학교, 사찰, 상점이 생겨나며 인구가 증가하여 어촌 도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292년에는 원나라 때 현으로 승격되었고, 명나라 시대에는 상당히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명나라 말기인 1553년에는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의 습격을 막기 위해 높이 8m에 6개의 성문이 갖춰진 성곽이 세워졌습니다. 현재의 올드 시티 지역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당시의 성곽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벽은 1912년에 철거되어 현재는 다징거 성루만이 남아 있습니다.
4. 서양 강대국의 주목과 아편 전쟁
19세기 중반
당시 청나라는 황금 시대의 빛이 바래가면서 강희, 옹정, 그리고 건룡 황제의 통치 아래 조정이 부패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밀수로 수입한 아편이 국내에서 널리 퍼져 전 국민이 중독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1780년에 1,000상자였던 아편 수요는 1840년대의 아편 전쟁 전에는 4만 상자로 급증했습니다. 이에 도광 황제는 아편 무역 금지 조치를 내리지만, 영국은 이를 무시하고 선전포고를 통해 '역사상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알려진 아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영국에 패한 청나라는 1842년에 불평등한 조약인 '난징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홍콩은 영국에 양도되었고, 광둥, 샤먼, 푸저우, 닝보, 그리고 상하이 등 5개 항구는 강제로 개항되었습니다. 이로써 서양 강대국의 주목과 함께 중국은 현대적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열게 되었습니다.
상하이 여행하기 전에 알고 싶은 것들 여행준비
5. 식민지의 그늘과 함께 피어난 신화 - 외국 조계지
1845~1945년
1845년, 와이탄에 처음으로 영국 조계지가 세워졌습니다. 조계지는 외국인 거주와 제국주의의 국가적 침략을 위한 중심지로 자리잡았습니다. 1848년에는 와이탄 북쪽의 홍커우에 미국 조계지가 설립되었고, 1849년에는 상하이 현성과 영국 조계지 사이에 프랑스 조계지가 설립되었습니다. 영국과 미국 조계지는 1862년에 합병되어 공공 조계지로 변모하며, 그 영향력은 장안쓰 일대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공공 조계지는 상하이 시 중심지를 차지하며 면적은 20㎢에 달하고, 프랑스 조계지는 6.6㎢로 확장되었습니다. 조계지는 치외법권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지만, 상하이 주민들은 조계에서의 체포를 제외하고는 일상에서 식민지 지배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상하이 주민들은 서구 문화를 열렬히 받아들이면서도 식민지의 그늘을 피해 무심히 살아갔습니다. 와이탄과 난징둥루 일대는 서구식 건축물과 다양한 무역 회사, 관공서, 은행 등이 들어서면서 상하이를 중국 최고의 모던 시티로 변화시켰습니다. 유럽식 주택과 중국 스타일이 결합된 스쿠먼 가옥이 건설되었고, 1861년에는 상하이의 수출 비중이 수출액의 50%를 차지하여 광저우를 앞질렀습니다. 전차가 운행되고, 서구식 백화점이 문을 열며, 고급 호텔의 재즈 카페와 사교 클럽이 인기를 얻으며, '하이파이 치파오'가 등장하여 1930년대를 상하이의 황금 시대로 기억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6. 혁명의 불씨가 튀어나다 -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의 시대
1912~1927년
중국 혁명을 이끈 쑨원은 청나라를 종식시키고 중화민국을 난징에 세우며 신해혁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혁명은 실패하고, 전국은 각지에서 일어난 군벌들로 뒤덮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21년에는 상하이에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중국공산당을 창립했습니다. 쑨원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 합작을 통해 대규모 군벌 타도에 나섰지만, 1925년 쑨원의 사망으로 인해 국공 합작은 결국 파열되었습니다.
1927년 4월,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총통으로 취임하며 대규모 공산당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1928년에는 군벌이 완전히 진압되어 중국은 국민당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한편 공산당은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대장정을 시작하여 홍군이라는 이름으로 18개 산맥을 넘고 17개 강을 건너며 1만 2,500km를 행군했습니다. 이를 통해 공산당은 중국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1927년 7월, 장제스는 상하이를 특별시로 지정하고 조계지와 중국인 거주지의 편차를 중이기 위한 신도시 계획을 추진했지만, 일본의 침략과 공산당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7. 일제의 강제 침략에 맞서다 - 항일전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931~1945년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항일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1932년 1월 29일에는 상하이에서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여 일본이 승리했지만, 이 전투에서 일어난 폭탄 투척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영웅 윤봉길이 등장했습니다. 윤봉길의 투척으로 고위 간부 7명이 사망하거나 다쳤는데, 이 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윤봉길의 행동을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창사, 충칭 등으로 청사를 이전해야 했습니다. 1937년에는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제2차 국공 합작에 참여했습니다. 이 합작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1945년에는 일본의 패망으로 중일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8. 새로운 성장을 위한 도전 - 푸둥 지구의 부상
1949~1990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 동안 상하이는 혁명의 중심지로서 변화와 도전을 겪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은 전통적인 문화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형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로 인해 식민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상하이는 점차 활력을 잃고 공업도시로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푸둥 개발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푸둥 개발의 핵심은 당시에는 소홀했던 푸둥 지구를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과 개방 정책의 주요 전략 중 하나였습니다. 푸둥 개발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자 상하이는 새로운 성장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도시는 다시 한 번 세계적인 중심지로의 부상을 이루어내었습니다.
9.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도시의 도전 - 엑스포
1990년~현재
20년 이상에 걸쳐 제2의 전성기를 즐기고 있는 상하이는 푸둥이 세계 무역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강화하고, 푸둥과 푸시 지역 간의 격차를 줄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뉴욕 월 스트리트와 견줄 수 있는 국제적인 중심지로 발돋움했습니다. 상하이는 2010년에 엑스포를 개최하여 '더 좋은 도시, 더 나은 삶'을 주제로 하여 전 세계에 도시의 미래 비전을 선보였습니다. 이로써 상하이는 국제 행사를 통해 시민 의식과 서비스 수준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질적인 도시 문제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국 최고 수준의 부동산 가격,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한 발전, 그리고 지속적인 빈부 격차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2015년에는 중국 도시 종합 경제 경쟁력 지수에서 상승하여 홍콩에 이어 3위를 차지했으며, 2016년 1분기 기준 중국 주요 도시의 GDP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의 성장과 성취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도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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